[소설 천안함-3]: 어둠의 이미지들과 2개의 공모의 그물망

-- <42장. 어둠속 백령도가 본 것>을 중심으로 --


[소설 천안함]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어둡습니다. 우선 줄거리 자체가 무겁고 어두울 뿐만 아니라, 그 안의 크고 작은 삽화들도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어두운 이야기의 흐름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부분이 <42장. 어둠속 백령도가 본 것>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대목들입니다.

1. ‘무거움’과 ‘두꺼움’의 강고한 이미지들

[소설 천안함]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천안함’입니다. 그 천안함이 우선 1,200톤급의 육중한 초계함입니다. 천안함 주변을 배회하고 충돌을 일으키는 정체불명의 잠수함들은 더 무겁습니다--아니, 무거울 뿐만 아니라 엄청 두껍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오하이오급 핵잠수함은 그 무게가 2만 톤에 육박하고 부위별 강판 두께가 무려 200~350mm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잠수함이야말로 독보적으로 ‘무거움’과 ‘두꺼움’의 전형이자 상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잠수함에 못지않게 무겁고 두꺼운 것이 또 있습니다. 부당하게 행사되는 국가권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국가권력의 일차적인 하수인인 군대도--특히 일반인의 눈에는--무겁고 두껍기 짝이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서로 벽을 쌓은 채 지정학적으로도 무겁고 두꺼운 여러 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초강대국 미국이 ‘동맹국’ 또는 ‘우방’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 말할 수 없이 강고한, 이중삼중의 무겁고 두꺼운 성벽을 구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리적으로 무겁고 두꺼운 것은 개개인에게 심리적으로 버겁습니다. 심리적으로 버거운 것은 자유 의지를 위축시킵니다. 자유 의지를 위축시키는 것은 동시에 개개인의 실천 의지를 감퇴시킵니다. 무겁고 두꺼운 것들이 얽히고 설켜 유형무형의 극심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할 때 더욱 더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처럼, 상식과 양식, 이성과 합리를 뛰어넘는 모종의 '색깔론’과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릴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적어도 천안함 사고와 관련하여서는 우리나라가 3년 가까이 무겁고 두꺼운 공안독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천안함 사고를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를 기피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누군가가 천안함 사고를 왈가왈부하는 것을 보거나 듣는 것조차 두렵게 다가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요컨대 온 국민이 저마다 극심한 자기검열, 자기감시, 자기통제의 수렁에 빠진 채 마치 '식물인간들'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 천안함]을 대하는 독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소설 천안함]이라는 제목 자체가 왠지 버겁게 느껴지는 바람에 소설을 읽는 것조차 무의식적으로 망설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호기심과 용기(?)를 갖고 소설을 읽게 되더라도,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에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소설 천안함]의 작가가 <서문> 말미에 스스로 다음과 같은 사족을 달고 있는 것도 바로 이처럼 무겁고 두꺼운, 우리 사회의 참담한 현실을 의식해서였을 것입니다.

“[소설 천안함]이 누구에게는 그냥 지나치는 소설이겠지만, 누구에게는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쓴 소설입니다.”

2. 각양각색의 ‘어둠'의 이미지들

한편 위에서 거론한 '무거움'과 '두꺼움'의 이미지에 앞서, [소설 천안함]의 중심 이미지는 아무래도 '어둠'의 이미지입니다. 천안함 사고 자체가 한밤중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발생했습니다. 구조구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함미, 함수가 가라앉은 30-50m의 수심마저--환한 대낮에도 시계가 극도로 제한된--캄캄한 어둠입니다. 이 같은 물리적인 어둠을 배경으로, [소설 천안함]에서 각양각색의 어둠의 이미지들이 겹겹이 중첩되고 또 여러 갈래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어둠’은 대개 부정적인 개념들과 상통합니다. 예를 들어 거짓, 은폐, 위장, 왜곡, 날조, 비밀, 협박, 공갈, 공모, 공포 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실 [소설 천안함]에서는,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말'조차 '어둠'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부 등장인물들의 '말' 자체가 상식과 양식, 이성과 합리에 비추어 도무지 수긍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좋은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41장>에 나오는 해군장교와 크레인선 선장 간의 짤막한 대화 장면입니다.

'삼아 2200호‘ 크레인선이 작업을 개시한 지 3일 만인 4월 12일, 수심 47m에 가라앉아 있던 함미가 밧줄 2개에 묶여 마침내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현장의 해군장교가 크레인선 선장에게 아주 묘한--그러니까 아주 ’어두운‘--말을 합니다.

요컨대 함미를 “다시 바다 속으로 집어넣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고, “(그렇게 함미를 다시 바다 속에 집어넣은 다음) 4.6km 정도 떨어진 장촌 앞바다로 수중 이동시켜 3일 후에 인양한다”는 방침이 하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해군장교가 크레인선 선장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합니다.

“내일과 모레 강풍이 불고 파도가 높아 작업이 어려울 수 있으니, 수심이 낮은 곳으로 이동시켜 정박하고 기다리랍니다.”

그런데 군 상부의 명령과 방침, 그리고 해군장교가 덧붙이는 말 자체가 실로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크레인선 선장이 해군장교에게 아주 어이 없다는 투로--조롱과 힐난을 곁들여--다음과 같이 질책성 반문을 합니다.

“(자네 해군 생활 대체 몇 년 짼가?) 강풍이 불고 파도가 높으면 (그럴수록) 이 깊은 바다 속에 그냥 넣어두는 게 더 안전하지, 이걸 매달고 저쪽 얕은 데로 가서 버티라는 거야? 그리고 지금 당장 바지선에 싣고 대청도로 피항하면 그게 더 안전하지. 안 그래?”

하지만 젊은 해군장교를 상대로는 짐짓 이렇게 힐난을 해 보는 크레인선 선장도 정작 무겁고 두터운 군조직을 상대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겁고 두껍기 짝이 없는 군조직의 그 ‘어두운’ 명령과 방침에 순응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수 십 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참혹한 시신으로 널브러져 있을-- 함미를 다시 바다에 집어넣고 장촌 앞바다로 이동한 다음, 군 상부의 명령에 따라 다시 함미를 2/3쯤 모습을 드러내도록 들어올립니다. 그리고 또 '어둠' 속에서 '어두운' 일이 '어둡게' 벌어집니다. SSU대원들과 해군장교들이 함미에 올라가 2시간쯤 모종의 '어두운' 작업을 하고 나서, 절단면에 초록색 그물을 씌운 다음 저녁 8시 45분쯤 함미를 다시 바다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해군장교가 크레인선 선장에게 또 다시 아주 묘한--그러니까 아주 ‘어두운’--말을 합니다.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주객전도의 '어두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장님과 여기 근무하시는 분들 힘드신데, 날씨도 안 좋아진다고 하니 대청도로 하루 대피하셨다가 오시랍니다.”

요컨대 크레인선의 주인이나 다를 바 없는 선장에게, 크레인 기사만 남겨놓고 모두 크레인선으로부터 철수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어둡기' 짝이 없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겁고 두꺼운 군조직과 맞서 크레인선 선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해군장교에게 쓴웃음을 지으며--조롱과 힐난을 곁들여--다음과 같이 대꾸할 따름입니다.

“여보게. 내가 궁금하긴 한데, 묻지는 않을게. 저 크레인 기사를 데리고 당신들이 뭘 할지 그건 안 물어보겠다고. 자 그럼, 수고하시게나.”

사실 천안함 사고의 전말 자체가 애초부터 ‘어둠’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고 이후 군의 각종 후속대처들 또한 ‘어둠’ 속에서 ‘어둡게’ 진행되었습니다. 애초에 ‘잘못 낀 첫 단추’ 때문에, 날이 갈수록 ‘어둠’이 또 다른 ‘어둠’을 낳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무도 감당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촘촘한 '공모의 그물망'이 형성되어 버렸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일들을 자행한 '주체들'마저 그 ‘그물망’에 갇힌 채 '빼도박도' 못하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소설 천안함]이 바로 그 같은 각양각색의 ‘어둠’과 기상천외의 ‘공모의 그물망’을 독자들에게 은근히--아니 어쩌면, 상당히 적나라하게--까발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작가가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겨냥했을 그 같은 효과가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 <42장. 어둠속 백령도가 본 것>입니다.

3. 다시 읽기: <42장. 어둠속 백령도가 본 것>(전문)

42장. 어둠속 백령도가 본 것 [이 부분은 상상의 산물입니다]

4월 12일 늦은 저녁의 백령도 앞바다에는 일체의 움직임도 없었고, 어둠이 짙게 내려와 보름이 넘는 동안의 바쁜 흔적들에게 고요한 휴식을 주고 있었다.

기 자들도 오늘 저녁부터 내일을 지나 모레까지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모두들 해안가에서 철수를 했고, 해안가를 지키는 해병대는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와 언덕 그리고 거의 모든 장소를 순찰하며, 퇴거를 요구했다.

그리고 어두운 밤은 더 깊어갔다.

오랜만에 백령도 해변가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불침번을 서는 해변가에 목석인 듯 철벽처럼 서 있는 해병대 초소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더 이상은 없었다.

내일부터 이틀 동안, 백령도 근해에는 예전에 없던 풍랑주의보가 내려졌지만, 밤이 깊어가는 그 시간에도 바람이나 풍랑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모두들 내일은 바람이 불 것이라 믿고 긴장을 풀고 하루를 마감했다.

기자들은 오랜만에, 해안을 꼭 지키면서 숨막히는 촬영과 취재하던 임무를 접고, 여관과 숙박시설에 모여서 늦은 담소와 원고정리를 할 즈음에...

삼아 2200호에 불이 하나 둘씩 켜졌고, 크레인 기사는 그 한밤에 크레인으로 불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해군장교의 지시에 따라서 물속에 있는 함미를 끌어올려 절반쯤 밖으로 드러내놓고 정지시켰다.

그리고, 크레인 기사는 다시 어디론가 불려갔고, 오랫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어둠속에서 립보트와 검은 고무보트들이 조용히 몰려들었고, 고속정 한 척이 천천히 불을 끈 채 다가와 함미 곁에 바싹 붙어서 정지했다.

그 러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고속정 곁으로 보트를 붙였다. 고속정의 측면에는 십여 개의 굵은 줄이 바닷속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1-2’라고 인식표가 붙은 줄을 잡아당겼다. 한참을 끌어올리자 그 줄 끝에는 대형 자루에 무엇인가가 담겨서 올려왔다.

두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그것을 끌어올려 함미쪽으로 들고 올라갔다. 그 다음 조는 ‘1-3’이라고 쓰인 줄을 끌어올리고 그 줄에 끌려서 올라온 자루를 끌어올려 그것을 가지고 함미로 들어갔다.

그렇게, 모두 9번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갔고, 5번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모두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크레인 기사는 다시 불려와서, 끌어올렸던 함미를 다시 바닷속으로 넣고 크레인을 내려와서, 켜졌던 불들을 하나 둘씩 꺼 나갔다.

백령도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둠속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


4. 소설을 빙자한 '보고서'

위 <42장>에는 아예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각양각색의 '어두운' 형체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둡게' 오가며 무언가 '어두운' 일을 벌이고 있을 뿐입니다. 서술배경 자체가 외부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바다 한가운데, 어둠 속의 한 지점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반토막으로 절단된 함미가 시커멓게 절반쯤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가히 ‘해상 공동묘지’라고 불러도 좋을, 실로 소름이 끼치고 진저리를 칠 정도로 ‘어두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어두운' 형체들 간에 일련의 ‘어두운’ 사태들이 '어둡게' 전개됩니다. 소리 없이 함미에 접근하는 ‘립보트’, ‘검은 고무보트들’, ‘고속정 한 척’,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등이 어우러져 각양각색의 ‘귀신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함미를 들락날락거리며 부산하게 옮기는 ‘대형자루들’은 영락없이 ‘시신들’을 연상시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런 ‘대형 자루들’을 ‘9번’ 끌어올려 함미로 들여가고, 그런 가운데 ‘5번’은 함미에서 들고 나옵니다. 그런 장면이 마치 야밤의 도축장과도 같은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이렇게 모종의 '어두운' 작업이 '어둠' 속에서 '어둡게' 끝납니다. 그리고 잠깐 고개를 내밀었던 시커먼 형체의 함미가 다시 ‘어두운’ 바다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립니다. 그리고...,

“백령도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둠속에서 아무 말도 없습니다.”

전후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 대목을 유심히 읽는 경우, 말 그대로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수십 명 꽃다운 젊은이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시신들('대형 자루들')마저 멋대로 방치되고 심지어 농단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대목에서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둡고 무서운 느낌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문이 생겨납니다.

첫째, 이 대목의 서술내용이 과연 사실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일까?

둘째, 이 대목의 서술에서 작가가 왜 이토록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셋째, 그 과정에서 작가가 겪었을 갈등과 고뇌의 무게가 얼마만큼이었을까?

우선 이 대목에 서술된 내용의 사실부합성 여부는 미지수입니다. 단지 함미를 침몰지점에서 바로 인양하지 않고 장촌 앞바다로 4.6km 수중 이동시켰다는 점(군 발표), 그런 다음 군이 크레인선 선장 및 인부들을 한시적으로 강제 철수시켰다는 점(관련 재판 증언) 등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항들은--여타 다른 후속대처들과 마찬가지로--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작업 현장 자체가 철저히 격리되고 봉쇄된 상태에서,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어둡게' 진행되었고 그 전말이 여전히 '어둠' 속에 '어둡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 대목에서--비록 "이 부분은 상상의 산물입니다"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왜 '시신들'을 연상시키는 '대형 자루들'까지 서술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요? 그 우선적인 이유는 아마 자칭 '공돌이'로서 작가 나름으로 행한 부단하고 치밀한 탐구의 결과 그 같은 개연성이 어느 정도 포착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그 같은 개연성을 다른 사람들--잠재적인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발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칭 '공돌이'로서 [소설 천안함]의 작가가 겪었을 갈등과 고뇌의 무게가 얼마만큼이었을까요? 이 마지막 의문과 더불어서는--필자 스스로--실로 숙연하고 처연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 부당하게 만연된 그 무겁고, 두껍고, 어두운 공포분위기를 떠올릴 때 더욱 더 그렇습니다.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지식인들, 종교인들, 시민사회운동가들, 작가들을 포함하여, 적어도 천안함 사고와 관련하여서는 온 국민이 마치 '식물인간들'처럼 살고 있는 버거운 현실을 돌이켜볼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소설 천안함]의 작가 역시 이처럼 버거운 현실에서 시종일관 의연할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소설 한 대목 한 대목을 써 나갈 때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겠지만, 특히 위 <42장>과 같은 서술을 작품 속에 도입하는 과정에서는 고뇌에 찬 갈등과 번민의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안함 사고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무겁고 두꺼운 '어둠'에 맞서 그 어둠의 '실체'를 밝히려는 작가의 도전 의식과 실천 의지에 힘입어 마침내 [소설 천안함]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소설 천안함]의 <서문>에서 작가는 '합조단'의 '천안함 보고서‘를 "거짓말로 도배된 소설"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소설이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의 '천안함 보고서'에 훨씬 더 가깝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소설 천안함]을 구성하는 50개의 장 중에서 단 3개의 장(28,31,42장)에만 '이 부분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단서를 달아놓고 있습니다. 이 또한 [소설 천안함]이 전반적으로--소설을 빙자한--'보고서'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요컨대 [소설 천안함]이 단순히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폭넓은 자료수집과 치밀한 자료분석을 수반한 작가 나름의 부단한 성찰과 고뇌 어린 탐구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5. 두 개의 '공모의 그물망'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천안함 사고를 두고 국가권력과 그 하수인인 군조직이--애초에 '잘못 낀 첫 단추'의 악순환을 거듭하며--도무지 돌이킬 수 없고 아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촘촘한 '공모의 그물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온 나라, 온 국민이 그 '그물망'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소설 천안함]은 그 촘촘한 '공모의 그물망'에 맞서 그것을 조금씩 풀어헤치기 위한 또 다른 '공모의 그물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천안함]을 매개로 삼아 아주 은밀하게, 자칭 '공돌이' 작가가 우리 모두를 그 '그물망'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소설 천안함]을 읽고 나면 왠지 조마조마한 가운데 의외로 마음이 홀가분해지기도 합니다. 작가가 은밀하게 펼쳐 놓은 또 다른 '공모의 그물망' 덕분에 한편으로는 적잖이 '어둠'이 걷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잖이 '공포'가 해소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41장>에서처럼 크레이선 선장이 젊은 해군장교를 조롱하고 힐난하고 질책하는 장면을 대하면서는, 무겁고 두꺼운 '어둠'의 속살이 얼핏 드러나는 가운데 독자 스스로 일종의 내면정화(카타르시스) 현상을 체감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소설을 빙자한 보고서'로서의 [소설 천안함]이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국가권력의 부당한 억압에 짓눌려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는 온 국민의 잠을 깨우는 '각성제', 사회 전체에 불합리하게 파급되어 있는 공포분위기를 상당 정도 희석시키는 '안정제', 그리고 천안함 사고의 진실규명에 대한 관심과 동참을 촉구하는 '자극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uid=186148&table=seoprise_13&field_gubun=천안함

(정치웹진 서프라이즈 서진실님의 글을 허락을 받아 이 곳에 옮겨 싣습니다.)




소설 천안함 1편부터 보기    http://cheon-an.tistory.c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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